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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독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는 나라니까 못 벌어서 못 먹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고 우리 사회에서 복지와도 같이 잘 사는 나라가 어느 정도 지원을 해주면 될 문제라는 생각은 매우 철없던 생각이었음을 알게 해준 책이다.

신자유주의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비단 물질의 대명사격인 돈, 자본에서만 나오는 문제가 아니다. 완전한 시장경제라는 말 뒤에 숨어있는 이면들은 식량이라는 것에도 적용이 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치부를 여실없이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문제를 사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로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책에서는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가 하는 문제도 언급을 하고 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힘없는 자의 푸념과도 같이 들렸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인 장 지글러는 책의 대부분을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어투로서 얘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자신 스스로도 안타까운 현실에 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한계에 부딪힌 듯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나라도 그랬을 수 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어투로 얘기해도 될 만하다. 행동하지 못하면서 말하는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책 한 번 읽고 안타까운 현실에 대해서 동조를 한다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리요? 이내 잊어버리고 말 것을... 무엇이든 백 마디 말 보다는 한 번의 행동이 더 의미있는 법이다.

그래도 우리가 이런 문제는 인지하고 있는 것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최근 나는 Climate Change, Global Warming 에 관심을 가졌었다. 어제 SBS 특집으로 방영된 "재앙"이라는 3부작 방송물도 시간을 내서 본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몰랐을 때는 그냥 그런가 부다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알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법이다. 무엇이든 관심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리라.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 번 읽어보길 권하는 바이다. 꼭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요, 꼭 행동으로 실천하길 바란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런 전지구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과 왜 그런 문제가 생겼는지에 대한 점을 알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순간만이라도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사소한 도움과 근원적인 해결

내가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기아 문제나 지구 온난화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미약한 행동으로나마 사소한 힘이라도 보태고 그런 문제가 언급될 때 귀담아 듣게 된다. 예전에 사회단체에서 일하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어려운 사람들을 조금씩 도와주기 보다는 그들이 지속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고... 즉 근원적인 문제 해결이 아닌 단편적인 접근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사람의 기대 심리만 증폭시키고 도움의 손길만 바라게 되는 결과만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문제 해결을 하는 데에 우리 둘은 다같이 공감하면서도 방법적인 측면이 달랐었다. 요즈음 들어서 나는 내가 과거에 했던 생각들이 참 어리석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이 또한 마찬가지다. 사소한 도움이라도 그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현실이며, 그런 사소한 도움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근원적인 해결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도움 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뜻한 주변의 관심 그래도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이 있구나 하는 희망이 그들의 삶을 버티고 좀 더 인간답게 살아갈 용기를 주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리 터전을 마련해준다 한들 그들이 살아있어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우리가 신자유주의를 논할 때 가장 크게 언급하는 것이 빈익빈 부익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면 "인간성 상실"이라는 것이 가장 큰 폐단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인권선언 제1조에 다음과 같이 명시가 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타고났으며 서로 동포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신자유주의 사상은 사람을 매우 차가운 이성만 가진 존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뜨거운 가슴으로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하기 보다는 나의 이해타산만을 따지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양산한 듯 하다. 능력에 따라 차등 대우를 받는 것과 시장경제 논리는 급속한 발전을 가져온 모티브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반대급부적으로 피폐해진 인간성 회복은 이 시대의 과제가 아닐까 한다.

우리가 역사를 돌아보면서 단순 암기 식으로 무엇은 무엇이다 하고 이성적인 접근을 하기 보다 그 시대 상황을 잘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지금 이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먼 훗날 후세들에게 어떻게 기록될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카놋사의 굴욕을 보면서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는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지금 시대의 투영된 생각일 뿐이다. 그 시대에는 그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아주 당연하게 느끼고 있는 것들이 후세에는 어찌 그렇게 몰지각한 사회 구조를 갖고서도 개선되지 않았을까 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큰 배는 쉽게 움직이지 않지만 한 번 움직이면 쉽게 멈추기도 힘든 법이다. 지금 이 시대의 그 많은 폐단에 대한 인식은 정보화 사회에 걸맞게 빠르게 확산되고 있고 예전보다는 변화의 속도가 빠른 시대이기에 언젠가는 바뀌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모든 사람은 의식주, 의료 및 필요한 사회복지에 의해 자신과 가족의 건강 및 복지에 충분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권리를 가지며, 실업, 질병, 심신장애, 배우자의 사망, 노령 기타 불가항력에 의한 생활불능의 경우에는 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세계인권선언 제25조 제1항에 있는 내용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인간의 생명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것과도 대체 불가능한 고귀한 것이다. 그런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의식주이다.

의료나 사회복지는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달라지는 것이다. 즉 시대를 반영한 삶의 질이라는 것으로 그 시대에 인간답게 사는 것이란 기준은 시대마다 달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의학의 발달로 쉽게 고칠 수 있는 질병을 치료하지 못해 생명에 위험을 가지는 경우는 달리 봐야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의식주는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기에 어떤 이해타산이 개입이 되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돈을 버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버느냐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같은 돈을 벌어도 존중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비난의 대상이 있는 법이다.

기아와 직결된 문제 해결에 참여하지는 못하는 우리라도 이성적인 판단 위에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무엇이 더 옳은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중에서 행동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고 그런 것들이 시대의 변화를 앞당기지 않을까?